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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한국의 대기업을 변화시키고 있는가?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115호

한국의 대기업은 애증의 대상이다.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화까지 겪은 ‘자원 빈국’ 대한민국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대기업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들은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이런 대기업이 지금 정경유착과 양극화의 주범이란 비판에 시달리며 개혁 대상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경유착과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특허 탈취 등이 대표적인 비판 사유다. 대기업 개혁 요구는 1980년대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된 모양새다.

작금의 개혁 요구는 사실 대기업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전폭적 지원 덕분에 압축 성장에 성공했지만,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 부실한 재무구조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핵심 원인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대기업 개혁이 시작된 것도 그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대기업간 사업 맞교환(‘빅딜’)과 부채비율 200% 제한, 계열사간 채무보증 전면금지, 부당내부거래 규제, 사외이사제 의무화, 소액주주의 소송권·장부열람권, 적대적 M&A 허용 등의 조치를 잇달아 취했다. 이후 노무현, 심지어 박근혜 정부 때까지도 대기업 개혁 정책이 정도만 달리할 뿐 계속됐다.

그럼에도 개혁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잠재 성장률의 지속적 하락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글로벌 경제위기,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인한 중국과의 갈등, 미·중 무역전쟁처럼 예상치 못했던 대형 악재들이 쏟아지면서 경기부양이 급했던 정부는 대기업에 손을 벌렸다. 결과적으로 역대 정부의 대기업 정책이 대기업의 부채비율을 낮춰주고, 규모를 키워주고, 신성장 동력 발굴을 도와주는 결과만 가져왔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최근 20여년 대기업 생태계의 변화와 그 동인들

실제로 한국 대기업의 판도변화는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다. 외환위기 이후 상위 30대 그룹 중 3분의 2인 19곳이 해체되거나 탈락했다. 그룹이 해체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룹이 대우 등 11곳에 달했고, 명맥은 유지했으되 30대 그룹 밖으로 밀려난 곳도 8곳이나 됐다.

반대로 30대 그룹에 남아 있는 11곳은 몸집을 불리며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을 비롯한 5대 그룹의 약진이 특히 눈부셨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국내 60대 그룹 자산 총액이 2000조 원이고, 상위 30대 그룹이 그 중 90%인 1800조 원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중 삼성이 420조 원이나 된다. 혼자서 30대 그룹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한 셈이다. 이어 현대차·SK가 200조 원대이고, LG·롯데가 100조원 대다. 이들 5대 그룹 자산을 합치면 60대 그룹 전체의 절반인 1000조 원이나 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는 정부 예산과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수퍼예산'으로 불리는 올해 정부 예산이 470조 원이고,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600조 원 정도다. 삼성의 자산규모가 정부 예산에 육박하고, 30대 그룹 자산총액이 GDP보다 400조 원(25%)이나 많은 것이다.

이처럼 외환위기 이후 상당수 부실 대기업이 몰락하는 사이, 살아남은 알짜 대기업들은 비약적인 성장을 일궈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기업간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2000년대 이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삼성 등 선두 대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반면, 하위 대기업은 지지부진했다. 무엇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성장의 키워드다. ‘전자업계의 영원한 라이벌’로 통했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순위가 뒤바뀐 것은 1994년이다. 그 이전에는 LG전자가 삼성전자를 앞섰다. 그러던 게 완전히 역전됐고, 지금은 비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으로 LG전자가 반도체를 포기한 사이, 삼성전자는 1992년 64MD램 세계 최초 개발을 시작으로 상승 가도를 달렸고, 최근엔 인텔까지 제치며 반도체 업계 세계 1위 자리에 올라섰다. 1970년대 중반에 벌써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진출한 ‘선견지명’과, 글로벌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불황 속에서도 최고의 인재를 영입하며 과감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던 ‘뚝심경영’이 일궈낸 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 뒤 애플과 벌인 건곤일척의 특허 분쟁도 삼성에게는 엄청난 보상을 안겨주었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이 ‘애플 對 삼성’의 양강구도로 재편됐으며, 모토로라 등 수많은 기업들이 퇴각한 시장을 둘이서 나눠 먹는 행운을 누렸다. 현재 삼성전자 이익의 90%가 반도체와 스마트폰에서 나오고, 삼성그룹 전체 이익의 90%가 삼성전자에서 나온다. 그 정도로 반도체와 스마트폰의 위력이 절대적이다. SK는 반도체와 이동통신이 키워드다. 섬유·화학에서 시작한 SK가 1994년 민영화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든 게 1차 도약의 계기였다면, 여기서 비축한 자금으로 2014년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은 그야말로 퀀텀 점프의 계기였다. SK는 하이닉스 인수 덕에 단숨에 현대차그룹을 바짝 추격하며 재계 2위 자리까지 넘볼 수 있게 되었다.

현대차의 경우는 외환위기가 도약의 계기였다. 외환위기 이후 재계 7위인 기아차를 인수함으로써 단숨에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고, 연구개발 조직과 플랫폼 공유 등을 통해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덕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국내에서 80%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현대기아차는 해외 생산·판매 중심의 글로벌 공략을 본격화하고, ‘쇳물에서 완성차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함으로써 글로벌 5대 메이커로 부상할 수 있었다.

시장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기업들이 도태되는 사이, 상위 대기업들은 급격하게 몸집을 불리며 폭풍 성장했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 자산은 최근 10년 새 170조 원에서 420조 원으로 2.5배가 불었고, 현대차와 SK도 각각 220조 원과 213조 원으로 2.5배 증가했다. LG와 롯데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은 인수합병(M&A)에도 적극 나섰다. 과거에는 기업을 분할하거나 신설하는 등의 방식으로 계열사를 늘렸는데, 최근에는 기술력을 갖춘 국내외 유망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는 방식으로 돌아섰다.

최근 4년간 국내 500대 대기업이 인수합병(M&A)한 건수가 372건, 금액으론 무려 43조 원에 달했다. 그룹별로는 삼성이 10조 원 이상으로 단연 1위이고, CJ, 롯데, SK, LG 등도 적극적이다. 자신들의 주력 사업을 보강해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고 성장성 높은 기업들을 신성장 동력 확보 차원에서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신생 대기업들의 약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포털업체인 카카오와 네이버, 게임 대표기업인 넥슨과 넷마블이 60대 그룹 반열에 올랐고, 부영, 하림, 미래에셋, 셀트리온 같은 자수성가형 대기업들의 선전도 눈에 띈다.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국 경제에 희망을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회의 변화에 뒤처진 일부 대기업의 문화와 행태

이 같은 전통 대기업과 신생 대기업의 성장은 한국 경제에 축복으로 비쳤던 게 사실이다. 수출 대기업이 성장하면 중소기업에까지 그 효과가 이어져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가계 소득이 증대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글로벌화가 본격화되면서 국내 대기업들은 오프쇼어링 정책, 즉 가격 경쟁력 확보와 관세장벽 극복을 위해 생산 및 판매 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일이 보편화됐다. 국내에는 연구개발과 경영 등 핵심 인력만 남겼다. 그 결과 대기업의 고도 성장에도 국내에선 일자리가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초래됐다.

대기업과 납품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 즉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특허 탈취 같은 문제도 비일비재했다. 이로 인해 납품 중소기업이 발전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소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모두 대기업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가 중소기업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여기에 대기업 오너 일가의 불법과 탈법, 갑질 행위까지 겹쳤다. ‘땅콩회항’에서 시작해 오너일가 갑질 폭로까지 이어진 한진그룹 사태와 롯데·효성가의 부자간·형제간 소송전, 상속·증여세를 탈루하기 위해 벌이는 대기업 오너일가의 일감몰아주기 백태가 국민적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문재인 정부의 대기업 개혁정책과 한계

이 때문에 대기업 개혁요구가 비등했지만, 준비 없이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 1년을 허송세월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중심의 ‘소득주도 성장’이냐, 김동연 경제부총리 중심의 ‘혁신 성장’이냐를 놓고 혼선이 이어졌다. 재벌 개혁의 고삐를 쥐고 있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순환출자 해소,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규제, 불법 하도급 문제 처리 등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권 중반기에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혁신적 포용성장’으로 정책 브랜드를 바꾸고 다시 대기업 개혁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사익편취, 부당내부거래, 불법하도급 거래 개선 등이 핵심이다.

한마디로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과 대중소기업간 ‘공정경제’ 실현이 목표인데, 여기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똑같은 정책을 실시해도, 인식이 잘못돼 있으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적할 게 ‘낙수효과’다.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 참모들이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게 ‘낙수효과는 없다’는 것인데, 이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낙수효과’는 대칭어인 ‘분수효과’와 마찬가지로 효과를 측정할 수 없는 비유적 표현이자 정치적 용어에 불과하다.

이에 관한 학문적 용어가 ‘전후방 연관효과’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자신의 저서 『종횡무진 한국경제』에서 제조업, 특히 하도급 거래를 통해 부품을 조달하는 정도가 높은 자동차·조선 등의 업종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대단히 크다고 강조하면서, 국내 중소기업의 70%가 하도급 관계로 묶여 있어서 전방기업 침체가 후방기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자동차·조선 분야 주력 대기업 부진이 하청 중소기업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파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면 이는 금방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낙수효과가 없다’고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 폐기를 선언한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투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참모들은 한 목소리로 한국의 GDP 대비 투자비중이 이미 세계 1위라며, 더 이상의 대기업 투자가 필요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맞는 말일까?

업종별 글로벌 1위 기업 대비 국내 1위 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비 비중을 조사해보면,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기업들은 글로벌 1위 기업 대비 투자비중이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현대기아차의 경우도 매출액 대비 R&D 비중이 일본 도요타의 2분의 1, 10대 메이커 중에선 꼴찌였다. 여타 업종의 경우는 더 심했다. 대기업의 R&D 투자가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의 차이를 낳는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강조할 점은 기업 규모를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게 과연 옳으냐 하는 것이다. 오너가 있는 국내 100대 그룹의 일감몰아주기 현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위그룹보다 하위그룹으로 내려갈수록 사익편취를 위한 일감몰아주기가 심각했다. 오너일가의 갑질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 현대차 같은 상위 그룹들은 공정위와 국세청, 검찰 같은 권력기관과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총출동해서 촘촘히 감시하지만, 하위 그룹과 중견·중소기업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서 오히려 문제가 심각했다. 최근 공정위와 국세청 실태조사 결과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불공정 하도급 거래와 계열사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오너 일가의 사익편취 문제를 대기업만의 문제로 보는 것은 무리다.

 

혁신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

지금 우리 경제는 과거처럼 수출, 대기업, 성장, 투자만 갖고 얘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중소벤처만 중시할 수도 없다. 당면한 문제를 복합적, 중층적으로 해석하고, 최적의 정책 조합(policy mix)을 통해 상충되는 정책 목표를 달성해내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 정책이 단선적, 이분법적으로 흐르면 사회적 갈등이 격화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갈등 해소에 진을 빼느라 당초 정책목표를 절대 달성할 수 없다. 대기업 역시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이익 창출’과 ‘성장 주도’만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역대 정부의 전폭적 지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점을 자각하고, 이익 창출을 넘어 ‘사회적 가치(CSV)’ 창출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한다. 최근 삼성, SK 등이 자사의 비즈니스 전반을 사회적 가치 창출 관점에서 재정립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기업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공동의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소비자와 국민들의 신뢰를 저버린 ‘나쁜 기업’은 오래 갈 수가 없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박재권은 기업 분석 전문매체인 CEO스코어데일리 (www.ceoscoredaily.com) 대표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와 동 대학원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석사 논문 '해방직후 소련의 대북한 정책(1945.8~1946.2)'이 '해방전후사의 인식5'(한길사)에 실렸다. 이후 시사저널 기자, 금융팀장, 디지털타임스 경제부장, 편집국장, 수석논설위원, 경제투데이 대표이사,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이 칼럼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박재권  mail@kea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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