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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주어진 ‘영감’을 바로 기억 속에 다시 묻다[수수꽃다리의 책 속의 세상] 실리어 블루 존슨의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제게 독서의 계절은 오히려 여름이었습니다. 가을엔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가고픈 곳은 잔뜩 늘어선, 가을바람에 함께 날리고픈 마음만 그득해지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햇살 앞에 설 자신도 없고 바다나 계곡을 찾아 뒹굴 열정도 없는 제게 가장 좋은 피서는 책 한 권 들고 에어컨 바람 시원한 카페 구석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나마도 잘 되지 않습니다. 책에 집중하기 보단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저 핸드폰을 건드리며 이런 저런 검색을 하는 게 편키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요…. 
 
그 멍한 와중에도 더디게 읽어나간 책 한 권.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꼬박 졸다 불현듯 떠오른 환영.
‘맨 살이 드러난 여인의 팔꿈치’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모처럼 휴가에 장맛비. 오두막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그림그리기. 그렇게 그려진 지도 한 장. 보물섬이 탄생됩니다.
 
언뜻 뇌리를 스치는 장면, 언뜻 떠오른 글귀, 언뜻 눈앞에 흐릿한 환영…. 위대한 작가와 평범한 우리의 차이는 이 ‘언뜻’을 놓치지 않고 물고 들어간다는 것, 이 ‘언뜻’을 길잡이삼아 스토리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더군요.
 
그 ‘언뜻’에 작가의 경험이 덧붙여지기도 하고, 어린 날의 환경이 배경이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소설이 형성되어갑니다.
 
<The hours>란 영화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원작자 마이클 컨닝햄이 17살에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읽고 뭔가 다른 구상을 합니다. 마이클은 어느 순간 버지니아 울프와 델러웨이 부인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의 엄마가 서있는 그림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이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세 사람의 구도가 떠오른 순간 그 다음은 그냥 진행되었습니다. 글이 저절로 움직이듯 써졌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도 나온 것입니다.
 
오래 전 보았던 제5원소란 영화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영감’이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지요. 단순한 상상만으로는 저렇게 엄청난 이야기가 어찌 나올 수 있을까 싶어서…. 영감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주 어느 곳에 존재하는 광경을 어느 순간 보고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우주도서관이란 용어에 대해 깊이 집착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주도서관은 우주의 모든 정보가 기록된 곳이라 합니다. 그 곳에 가면 아주 사소한 티끌까지도 기록이 되어있다고…. 제게 관련된 모든 것까지도…. 물론 우주에 지구 이상의 진화된 존재들이 있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명상을 통해 이 우주도서관에 접속이 가능하다 하여 꽤나 노력해보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무언가로 인해 특정기억이 떠오를 때가 곧잘 있습니다. 추억이 담긴 음악이라든지 사진이라든지…. 이 책을 읽으며 제겐 ‘영감’에 몰두해 영적 관련 책들을 탐독했던 30대 후반의 기억들이 떠올려져서 잠시 영적 기운을 다시 느껴보았습니다.
 
사소하지만 작은 줄기가 명작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심심풀이로 들려주던 이야기가 온 세상을 놀래키기도 합니다. 나의 시시하고 고달픈 삶이 다른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동반자가 되기도 하구요. 
 
다만 우리는 ‘언뜻’ 주어진 ‘영감’을 바로 기억 속에 다시 묻고 있을 따름입니다….
 

노계향  ghroh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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